‘설렘(Idea hits)’으로 시작한 설계 프로젝트가 ‘복잡함(Problems begin)’과 ‘좌절(Pit of despair)’을 지나 ‘몰입(Flow)’과 ‘사후 확신(Finish)’에 도달하기까지. 실제 현장에서 이 곡선을 끝까지 완주하는 회사는 얼마나 될까.
현장 내 지식(Knowledge)·노하우(Know-how)가 시스템의 자산(Asset)으로 치환되지 않는다면, 프로젝트는 담당자의 기억력과 컨디션에 의존하는 도박이 된다. 숙련된 엔지니어가 거친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최적의 파라미터가 조직의 공통 규칙으로 저장되지 않고 개인의 경험으로만 머물기 때문이다. 프로젝트가 '좌절'의 구간에서 정체되는 진짜 이유는 기술의 부재가 아니라, 과거에 확보했던 정답이 현재의 설계 프로세스에 동력으로 재공급되지 못하는 단절에 있다.
결국 기술이 해결해야 할 지점은 '개인의 경험'을 '조직의 시스템'으로 동기화하는 것이다. 한 번의 완주 과정에서 쏟아진 수많은 의사결정과 검증 데이터를 압축해, 다음 프로젝트가 즉시 참조할 수 있는 표준 가이드라인으로 세팅해야 한다.
그래야만 조직의 기술력은 원점이 아닌, 앞선 성공이 도달했던 종착지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한 번의 완주에서 나온 경험을 다음 프로젝트의 자산으로 쓸 수 있을까”
‘설렘’의 디자인이 ‘복잡함’의 늪을 건너는 법...엔지니어링이 된 인테리어 감각
이탈리아 프리미엄 가구 브랜드 ‘몰테니그룹(Molteni Group 이하 몰테니)’은 자사 제품의 가치를 단순한 가구로 포장하지 않는다. 이들이 포지셔닝한 것은 고객이 제품을 수십 년간 곁에 두는 한 점의 인테리어이자 장기 자산으로 인식하도록 했다. 그 이면에는 수천 개의 부품·소재가 얽힌 복잡한 엔지니어링의 집합이 있다.
이처럼 몰테니는 집 전체를 하나의 통합된 설계 여정으로 본다. 문제는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과정에서 특정 테마나 디자이너의 철학이 담긴 ‘컬렉션(Collection)’과 개별 제품의 세부 사양인 ‘옵션(Option)’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이 방대한 변수의 조합을 통제하기 위해 데이터 중심의 의사결정 체계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인식된다. 몰테니는 이렇게 디자인 스튜디오와 생산 파트너가 복잡하게 얽히는 상황에 주목한다. 이 관점을 기틀로 10년 뒤에도 기능하는 일관된 디자인 언어를 자산으로 관리하기 위해 프로젝트 운영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안드레아 로에로(Andrea Roero) 몰테니 최고정보책임자(CIO)는 “우리가 지향하는 부분은 소파 한 점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 즉 집 전체에 스며드는 사용자 경험(UX)의 극대화”라며 “그래서 디자인 영역을 수십 년을 버티는 오랜 자산으로 관리해야 했다”고 말했다.
사측은 이 같은 복잡성을 타파하는 과정에서, 다쏘시스템(Dassault Systèmes)의 가상 환경 방법론 ‘버추얼 트윈(Virtual Twin)’ 플랫폼 ‘3D익스피리언스(3DEXPERIENCE)’을 활용한다. 이 위에서 활약하는 거버넌스·협업 프로세스 시스템 ‘에노비아(ENOVIA)’는 디자이너의 다양한 구상을 단일 프로젝트 맥락으로 엮는다.
디자인 콘셉트, 구조·하중 조건, 공급망 기반 소재·마감 정보 등 데이터가 이에 해당한다. 같은 가구라도 국가·채널별 규격·인증, 소재 조합 등이 달라지는 현실을 관리 체계(Governance) 관점에서 통제하기 위한 선택이다. 로에로 CIO는 “컬렉션과 옵션이 쌓일수록 감각만으로는 품질·일관성을 유지할 수 없고, 설계 규칙과 데이터가 있어야 디자이너를 다시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여기에 다중 물리 시뮬레이션 솔루션 ‘시뮬리아(SIMULIA)’ 계열의 모의 실험 기술 체계가 더해지면 몰테니의 감성은 물리 법칙을 통과한 제품 경험으로 전환된다. 이를 통해 쿠션·프레임 구조를 바꾸며 착석감·내구성을 검증하고, 장기간 사용 시 변형과 소음을 미리 예측한다. 겉으로는 ‘앉았을 때 느낌이 좋은 소파’로 설명되는 제품이, 내부에서는 수많은 구조해석(FEA)과 피로 시험(Fatigue Test)의 데이터로 뒷받침되는 구조다.
몰테니는 이 과정을 한 번의 프로젝트에서 끝내지 않는다. 에노비아는 각 제품 개발에서 사용된 구조 조합, 소재 전략, 인증 대응 패턴 등을 차세대 프로젝트의 기본 틀(Template)로 남긴다. 즉, 한 번의 완주로 확보한 지능형 자산을 시스템의 유전자로 각인해, 다음 시즌의 프로젝트 완성도와 직관성을 극대화하도록 도모한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라인을 구상하면서도 기존에 검증된 프레임과 소재 조합을 바로 불러와 쓸 수 있고, 공장은 예측 가능한 공정·원가 구조를 유지한다. ‘한 번의 프로젝트 완주 경험’이 차기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자전거 설계의 ‘좌절’, 시뮬레이션으로 ‘몰입’의 추진력을 되찾다
자전거는 구조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프레임 형상과 재료 선택에 따라 주행 느낌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장비다. 라이더는 이를 탄성·반응성·피로감 등 감각적 표현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설계자는 용접부 응력, 튜브 두께, 접합부 강성, 피로 수명 같은 물리 변수로 다룬다. 제품 완성도를 위해서는 그래야만 한다. 이 간극을 줄이는 도구가 ‘시뮬리아’다.
미셸 애시(Michele Ash) 다쏘시스템 시뮬리아 최고경영책임자(CEO)는 “라이더가 말하는 탄성·반응성·피로감 같은 감각의 언어는 엔지니어에게 하중·강성·피로 수명의 언어로 번역돼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은 그 두 언어를 물리 모델 위에서 만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브라질 자전거 제조사 ‘칼로이(Caloi)’는 설계·제조 전반에 다쏘시스템 컴퓨터지원설계(CAD) 솔루션 ‘솔리드웍스(SOLIDWORKS)’와 시뮬리아를 접목한다. 사측은 자전거 프레임 개발 프로세스를 혁신한 방법론으로 이를 다룬다.
이들은 새로운 프레임을 개발할 때마다 물리적 시제품에 의존하던 낙하(Drop)·충돌(Crash)·피로 시험의 상당 부분을 가상 환경으로 옮겼다. 설계 단계에서 수십 가지 형상과 벽 두께 조합을 시뮬리아 기반의 FEA로 미리 거르고, 최종 후보만 실제 양산 도구와 시험 장비에 올리는 방식이다.
칼로이는 이 과정에서 단순히 시험 횟수를 줄이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어떤 형상과 두께, 어느 정도의 안전율이 실제 라이딩 감각과 가장 가깝게 맞물리는지 데이터를 쌓았다. 동일한 강성이라도 어느 구간에 강성을 더 주었을 때 라이딩 시 ‘좋은 주행 질감’이 나고, 어느 방향으로 응력 분포를 바꿨을 때 장거리 피로감이 줄어드는지까지 데이터로 남겼다.
북미 자전거 브랜드 ‘트렉바이시클(Trek Bicycle 이하 트렉)’도 솔리드웍스 기반 설계 데이터 위에서 비슷한 ‘모델링·시뮬레이션 통합(MODSIM)’ 접근법을 적용하고 있다. 특히 다양한 라이더의 라이딩 스타일과 이들이 지나는 지형에 맞춘 카본(Carbon)·알루미늄(Aluminum) 프레임 구성을 반복 설계할 때 이 메커니즘을 적극 활용한다. 나아가 후속 모델에서 어떤 요소를 유지·변경할 것인지에 대한 설계 규칙(Rule)을 프로젝트 단위로 기록해 지식·노하우의 파편화를 막는다.
이처럼 두 회사는 설계자가 마주하는 ‘단순 반복 시험 수행’과 ‘파편화된 정보 탐색 과정’을 동시에 제거함으로써 '좌절'의 구간을 돌파하고 있다. 애시는 “중요한 것은 시뮬레이션이 실제 라이딩에서 느끼는 차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느냐는 것이고, 설계자가 그 결과를 그대로 다음 설계 결정에 가져갈 수 있을 때 버추얼 트윈 환경에서의 시험 및 검증이 의미를 갖는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시뮬리아는 가상 환경의 물리 법칙을 책임지며 수백 번의 시제품 제작 없이도 설계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에노비아는 설계 전 주기의 데이터가 꼬이지 않도록 관제탑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 설계 하나 바꿀 때마다 따라오는 복잡한 서류 작업과 부품 번호 정리 등 소위 ‘귀찮은 뒷수습’을 시스템이 알아서 다 해주는 구조다. 덕분에 엔지니어는 잡무에 시달리는 대신 ‘어떤 느낌의 자전거를 만들지’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된다.
뭘 만들었는가에 대한 대답...‘사후 확신’의 지표를 자산화하는 방식
이 같은 다쏘시스템의 솔루션 철학은 사출 성형과 부품 가공을 병행하는 영국 중소 제조사 ‘노델(Nordell)’에도 닿았다. 자사 디지털 제조 및 운영 최적화 솔루션 ‘델미아(DELMIA)’의 제조실행시스템(MES)·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 ‘델미아웍스(DELMIAWorks)’를 공급한 사례다. 작업자의 감이 아닌 ‘시스템이 기억하는 제조 이력’으로 프로젝트를 매듭짓는 전략이다.
이 회사는 고객사별로 서로 다른 정보를 찾고 채택해야 했다. 플라스틱 소재, 금형 조건, 품질 기준 등인데, 이 과정에서 반복적인 시행착오를 겪었다. 사측은 작업자의 경험에만 의존해 조건을 맞추고, 생산 정보는 엑셀에 따로 기록하다 보니 데이터가 겉돌기 일쑤였다고 고백했다. 프로젝트가 조금만 틀어져도 어디가 병목인지, 무엇이 최선인지 설명해 줄 근거가 없어 매번 어려움에 직면한 것이다.
노델은 델미아웍스 도입 이후 주문·생산·재고·품질 등 핵심 데이터를 하나의 흐름으로 통합했다. 특정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소재, 금형 세팅, 공정 주기, 실측 불량률, 재작업 비율, 납기 준수율 등을 한 번에 조회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한 것. 회사는 새로운 주문이 들어오면 과거 유사 프로젝트와 조건을 비교해 가장 안정적인 조합을 제안하는 것도 가능해졌다고 효용성을 언급했다.
마이크 버클리(Mike Buchli) 솔리드웍스 부사장은 이 같은 중소·중견(Small and Medium-sized Business, SMB) 도입 사례를 두고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는 거대한 로봇 셀이나 자율창고가 아니라, 무엇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끝까지 추적할 수 있는 공장에서 비롯된다”고 짚었다. 모든 데이터 추적 가능성이 확보된 뒤에야 ERP·MES·데이터 플랫폼 전환이 의미를 가진다는 설명이다.
노델의 관점에서 보면, 한 번 제대로 끝낸 프로젝트는 델미아웍스의 시스템 안에서 ‘가장 완벽했던 정답지’로 남는다. 다음에 같은 주문이 들어오면 처음부터 고민할 필요 없이, 이미 검증된 데이터 세트를 그대로 꺼내 쓰면 된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또한 결국 숙련공의 머릿속에만 있던 노하우를 시스템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지능형 자산’으로 바꾼 셈이다. 이처럼 성공의 기억을 데이터로 고정해두면, 어떤 현장에서도 무엇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득력 있게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게 된다.
헬로티 최재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