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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컬처] 식스도파민 “AI가 벽을 무너뜨리는 순간 프레임은 무대로, 관객은 진짜 참여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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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을 넘어서, 관객을 주체로 이끄는 무대”

 

영화 연출을 전공한 박 억 대표는 오랫동안 프레임 안에서 세계를 구성해 왔다. 영화는 관객의 시선을 스크린 속 특정 지점으로 고정시키고 화면 속 질서를 감독 의도대로 설계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본질적 강점이자 동시에 그가 언젠가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느낀 구조이기도 했다. 팬데믹으로 영화계의 숨이 가빠지고 투자와 배급의 흐름이 거칠게 막혀 있을 때, 그는 이 매체가 지닌 구조적 속성을 다시 바라보게 됐다.

 

 

“이 방식으로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빠르게 내놓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관객의 경험 방식이 이미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죠.” VR과 인터랙션 기반의 공연을 처음 접했을 때 그는 그동안 통제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가 분명히 존재했음을 깨달았다. 박 대표가 말한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프레임을 걷어내는 경험’이었다. 영화는 관객이 어디를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를 철저하게 규정하지만 VR과 인터랙션 퍼포먼스는 관객에게 훨씬 넓은 자유를 제공한다. 관객이 직접 세계 안으로 들어와 움직이고, 무엇을 가져갈지 스스로 선택한다. 그는 이 지점을 ‘관객이 스스로 의미를 픽업하는 구조’라고 말한다. 감독이 모든 것을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조건을 만드는 설계자로 이동하는 방식이다.

 

관객의 움직임이 작품을 움직이는 순간

 

박 억 대표의 공연은 시작부터 기존 무대 문법과 다르게 흘러간다. 지난 2025 아트코리아랩 페스티벌에서 선보였던 식스도파민의 <'너'로 댄스>는 공연 5분 전에 가볍게 시작을 예고하는 안내 멘트가 있지만, 그것은 공연을 알리는 선언이라기보다 관객의 리듬을 서서히 바꾸기 위한 연출 장치에 가깝다. 진짜 공연은 관객이 공연을 기다리던 차에 무용수가 갑작스레 등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관객에게는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갑작스럽게 공연 그 자체로 끌어들여 스스로 상황을 감지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관객이 스스로 ‘아, 내가 뭔가 해야 하는 상황이구나’를 깨닫는 게 중요해요. 설명이 많아지면 자율성이 사라지거든요.” 이러한 설계는 단순한 참여 유도가 아니라 관객이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공연이 굴러가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작업이다. 이 구조는 박 대표가 팬데믹 이후 관객의 체질을 다시 관찰한 경험과도 연결된다. 태어났을 때부터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사용해온 알파세대(Generation Alpha)이자 어린 시절부터 아이패드 등 태블릿 기기와 함께 성장해 온 아이패드 키즈(iPad Kids)로 이름 붙여지는 요즘 10대와 유튜브 라이브를 보던 자리에서 그는 매우 명확한 변화를 목격했다. 아이들은 라이브 방송임에도 불구하고 배속 조절을 시도하고, 채팅으로 개입하며, 넘어가고 싶은 순간을 적극적으로 건너뛰려 했다. “요즘 세대는 ‘그냥 보기’를 견디기 어려워해요. 콘텐츠가 자신에게 반응하길 원하고 자신이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이러한 변화는 이미 시장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슬립 노 모어’ 같은 이머시브 시어터(‘몰입형 공연’ 또는 ‘관객 참여형 공연’, 관객이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대신 작품 속 공간을 직접 이동하며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경험하는 공연 방식을 뜻한다.)는 고가의 티켓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완판되고 방탈출과 체험형 취미 플랫폼, 연극과 게임의 요소를 섞은 신형 콘텐츠가 탄력을 받는다. 박 대표는 이러한 흐름을 “스크린 이후 세대”라 칭하며 관객이 움직임 없이 머무르기를 어려워하는 시대에 예술은 관람 중심 구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AI는 가장 빠른 ‘시작점’이자 가장 불투명한 ‘동료’

 

이러한 흐름 속에서 그의 작업에서 AI는 든든한 동료가 됐다. 특히 창작 초반 단계에서 AI는 시작을 망설이지 않으며 강력한 진행 속도를 제공한다. “AI는 이미 첫 문장을 써버립니다. 창작자에게 가장 두려운 백지의 순간을 넘게 해 줘요.”

 

이 해방감은 분명하다. 그는 과거에는 3부작 같은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첫 단계의 방향을 잡는 데만 긴 시간을 사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 세계관을 이어갈 10가지 옵션을 알려달라”고 AI에게 질문하면 즉시 여러 가능성을 던져준다. 그는 이를 ‘선풍기 비유’라고 설명한다. 아이디어를 어지럽게 흩뿌리고, 우연적 조합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던 방식이 이제는 AI를 통해 훨씬 빠르고 정교하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AI는 동시에 가장 큰 난제도 제공한다. 바로 설명 불가능성, 즉 ‘블랙박스’라 표현되는 AI의 속성이다. 박 대표는 “AI는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협업 과정에서 인간이라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 수정을 할 수 있지만, AI는 잘못된 결과를 내놓아도 그것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는 AI 딥러닝 과정에서 입력과 출력은 알 수 있지만 그 사이의 결정 과정이 인간에게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AI 모델의 특성과 연관된다. 그래서 그는 창작자 입장에서는 “가챠를 돌리는 기분”, “샤머니즘에 기대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AI는 박 대표에게 새로운 예술 언어를 발견하게 해주는 파트너로 자리 잡고 있으며 좋은 파트너십을 맺기 위한 균형잡기를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AI는 분명 창작자의 시작에 큰 원동력이 되지만,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의 결정은 인간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한다”며 “AI는 시작을 만들어주지만, 책임은 결국 인간이 지는 구조예요.”라고 강조했다.

 

AI를 다루면서 자신의 창작 언어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는 것도 느낀다. 도메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AI를 더 깊이 있게 활용하게 되는 흐름 속에서 그는 기술과 예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작가성의 이동: 만들어진 ‘형태’에서 발생하는 ‘파동’으로

 

예술에서 작가성은 오랫동안 창작자가 결과물을 직접 만드는 능력을 의미해왔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보편화되면서 이 개념은 다시 정의되고 있다. 박 대표는 이를 “돌멩이를 만드는 능력에서 돌멩이를 던져 파동을 만드는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I는 돌멩이, 즉 예술을 만드는 데 능숙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돌을 언제, 어디에, 어떤 의도로 던질지 결정하는 감각은 인간의 역할이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예술의 중심이 결과물 자체에서 벗어나 작품이 만들어내는 해석과 의미의 장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작가가 작품을 던지면 그 이후의 해석은 관객에게 달려 있어요. 저는 요즘 저 자신을 ‘작가’라기보다 경험의 가이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공연은 각본이 완성된 상태에서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움직임과 선택을 만나며 서사가 실시간으로 구성되는 구조를 취한다. 이는 산업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전환이다. 예술의 생산 방식이 고정된 제작 공정 중심에서, 사용자 행동 기반의 실시간 생성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AI 배우를 향한 기술적 실험

 

 

박 대표의 최근 프로젝트, '너'스텔지아와 '너'로댄스는 서로 다른 영역을 실험하는 작품이지만 하나의 목적을 향해 모이고 있다. 바로 AI 배우(AI Actor)다.

 

그는 AI 배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드래곤볼 모으기(일곱 개의 드래곤볼을 모으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유명 일본 만화 ‘드래곤볼’에서 나온 비유)에 비유한다. '너'스텔지아에서는 관객의 감정을 읽고, '너'로댄스에서는 관객의 몸의 움직임을 읽는다. AI 배우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목소리·표정·동작·감정·상황 판단 등 다양한 신호를 읽는 능력이 필요하고 각각의 능력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을 통해 축적되는 중이다.

 

AI 배우가 등장하는 미래에는 기존 공연으로는 불가능했던 형태의 무대가 실현될 수 있다. 특정 관객 한 명을 위한 공연, 혹은 실시간 감정과 반응을 기반으로 공연이 매 순간 재구성되는 형태가 가능해진다. 그는 “프리 프로덕션만 1년 걸리는 개인 공연이 1억이더라도 구매할 사람이 생길 것”이라고 비전을 밝혔다.

 

이는 산업 기술적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실시간 감정 분석, 모션 캡처, 센서 퓨전, 디지털 트윈 기반 퍼포먼스 엔진 등 복합 기술이 하나의 예술 구조로 통합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제 기술 실험의 최전선이 될 수 있다.

 

프레임 밖에서 시작된 질문: “AI도 춤출 수 있을까?”

 

 

''너'로댄스'는 박 대표의 질문 하나에서 시작됐다.
“AI에게도 춤이 가능한가?”

 

그에게 춤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내적 감각을 외부로 드러내는 말 없는 말’이다. 그는 춤이 가진 본질적 속성—내면의 감정이 움직임으로 번역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그래서 '너'로댄스는 관객이 안무를 재현하는 작품이 아니라 VR 안에서 자신의 감정·신체 반응·움직임이 실시간으로 장면을 구성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사람은 원래 춤추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다만 쓰지 않아서 퇴화된 거죠. 기술은 그 감각을 깨우는 장치입니다.”

 

'너'로댄스는 기술이 감정을 대체하는 공연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관객 안에 잠든 감각을 깨우고 ‘내 몸이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 있구나’라는 자각을 만들어주는 장치다. AI가 춤을 추는가 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나는 어떤 춤을 추고 있는가?” “내 감정은 어떻게 움직임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그 질문을 받은 관객은 결국 자신에게 묻게 된다.

 

이 작품은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이 다시 자기 감각을 되찾는 미래를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대중들이 느끼는 AI가 인간의 영역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감각과 감정의 자유를 되찾아준다. 이러한 힘은 그가 강조하는 ‘경험’과 ‘체험’에서 비롯된다.

 

기술과 감각이 만나는 새로운 예술의 좌표

 

박 대표의 작업은 기술을 장식적으로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다. 그는 기술을 경험의 근본 구조를 만드는 재료로 삼는다. 관객의 움직임을 읽고 감정의 변화를 포착하며, 세계의 조건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기술은 공연의 핵심 엔진이 된다.

 

그렇다고 기술이 공연의 본질을 대체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AI가 예술을 바꿀지라도 지금 관객과 마주하고 그들의 반응을 직접 보는 일은 인간만의 몫입니다.”

 

기술은 그에게 새로운 언어를 제공했다. 하지만 작품을 움직이는 힘, 관객과 만들어내는 감정의 파동, 인간이 서로를 느끼는 순간은 여전히 사람의 몸과 감각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의 공연은 기술적 실험이자 감각의 회복이고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당신의 춤은 어디에 잠들어 있었는가?”
“기술이 흔들어 깨우는 당신의 감각은 어떤 모습인가?”

 

이 긴 질문들은 아마 앞으로의 예술이 나아갈 방향을 넓게 가리키고 있을지 모른다. 그의 무대는 관객이 스스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세계를 만들고 기술을 통해 새로운 감각의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박 억이라는 창작자는 그 문을 열어두고 관객이 예술이라는 무대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 순간을 이끌어 내고 있다.

 

헬로티 구서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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