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전력망·AI까지 묻는 RE100 산단의 현실성
선언과 실행 사이, 한국형 RE100 모델 시험대
RE100은 더 이상 일부 글로벌 기업이 선택하는 ‘친환경 선언’이 아니다. 재생에너지 100% 사용 여부는 이제 글로벌 공급망에서 거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새로운 기준이 됐다. 애플, 구글, BMW 등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사에게까지 RE100 이행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를 충족하지 못한 기업은 공급망에서 밀려나는 사례도 현실이 되고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제조업에 RE100은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이다. 그러나 국내 재생에너지 비중은 낮고, 경직된 전력시장과 전력망 한계로 개별 기업이 RE100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해법으로 정부가 꺼내 든 카드가 ‘RE100 산업단지’다. 산업단지 단위로 재생에너지와 전력 인프라, 에너지 관리 기술을 묶어 기업의 RE100 전환을 지원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RE100 산단은 지금 어디까지 와 있으며, 글로벌 경쟁 속에서 실질적인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자발적 선언은 끝났다… RE100이 ‘조건’이 된 이유
RE100은 더 이상 기업의 친환경 이미지 전략이 아니다. 글로벌 공급망 전반을 재편하는 실질적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애플, 구글, BMW 등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사와 공급망 기업에 재생에너지 사용을 요구하며, 이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거래 축소나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 RE100은 자발적 캠페인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글로벌 기업들이 사용하는 새로운 압박 수단이 됐다.
한국 산업이 이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제조업 비중이 높고 수출 의존도가 큰 산업 구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전자, 화학 등 주력 산업은 글로벌 공급망과 긴밀히 연결돼 있다. RE100 이행 여부는 환경 이슈를 넘어, 기업의 수출 경쟁력과 직결되는 조건으로 작동하고 있다.
개별 기업 대응의 한계, 산업단지가 대안으로 떠오른 배경
문제는 국내 기업들이 RE100을 이행하기 위한 환경이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내 재생에너지 비중은 여전히 낮고, 중앙집중형 전력 공급 구조와 경직된 전력시장 제도는 기업의 선택지를 제한한다. 대기업 일부는 해외 생산기지를 활용하거나 직접 재생에너지 조달에 나서고 있지만, 중소·중견기업에는 현실적인 대안이 부족하다.
이런 한계 속에서 정책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 ‘RE100 산업단지(산단)’다. 기업 개별이 아닌 산업단지 단위로 재생에너지 발전, 저장, 전력망, 에너지 관리 인프라를 구축해 입주 기업의 RE100 이행을 집단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구상이다. 이는 단순한 신재생 설비 확대 정책이 아니라, 산업 인프라 자체를 에너지 전환에 맞게 재설계하겠다는 시도다.
해외 선도국이 선택한 공통 전략
보고서는 미국·영국·중국의 사례를 통해 RE100 산단 전략의 공통 공식을 도출한다. 미국은 70억 달러를 투입해 7개의 청정 수소 허브를 구축하며, 각 지역의 산업 구조와 자원 여건에 맞춘 분산형 모델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은 신규 산단 조성 대신, 중공업이 밀집된 Humber 지역을 중심으로 수소와 탄소포집저장(CCS)을 결합해 기존 산업의 탄소중립 전환을 꾀하고 있다.
중국은 접근 방식이 더 공격적이다. 산업단지가 전체 탄소 배출의 핵심이라는 판단 아래, 국가 차원에서 넷제로 산업단지를 전략적으로 육성해 왔다. 내몽골 오르도스에 조성된 Envision-Ordos 산업단지는 AIoT 기반 에너지·탄소 통합 관리 시스템을 적용한 세계 최초의 디지털 넷제로 산업단지로 평가받는다. 중국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탄소중립 산업단지 표준을 국가·국제 표준으로 확산시키는 전략까지 병행하고 있다.
세 나라의 사례는 방식은 달라도 공통된 방향을 가리킨다. 국가 주도의 명확한 비전과 투자, 지역 산업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설계, 그리고 에너지·저장·관리 기술의 통합적 접근이다.
한국형 RE100 산단, 정책 의지는 분명하지만
한국 정부 역시 RE100 산단을 국정 핵심 과제로 설정했다.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반영됐고, 중기 재정운용계획과 2026년 예산안에서도 관련 투자가 확대되고 있다. ‘RE100 산단 특별법’ 제정도 추진 중이다. 정책 의지만 놓고 보면 주요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행 단계에서는 과제가 뚜렷하다. 보고서는 네 가지 핵심 병목을 지적한다. 첫째, 재생에너지 공급 규모와 설치 속도. 둘째, 장주기 에너지저장장치(ESS)의 미성숙. 셋째, 전력망 인프라 부족과 계통 병목 문제. 넷째, 산업단지 전체를 아우르는 AI 기반 통합 에너지 관리 경험의 부족이다.
특히 전력망 문제는 가장 현실적인 제약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확대될수록 출력제어와 계통 안정성 문제가 빈번해지고 있지만, 이를 흡수할 유연성 기술과 인프라는 아직 초기 단계다. 재생에너지 설비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RE100 산단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기술은 준비됐지만, ‘통합 운영’은 아직
개별 기술의 준비도만 놓고 보면 상황은 나쁘지 않다. 태양광·풍력 발전 기술은 성숙 단계에 있고, 국내 ESS 산업 역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산업단지 에너지관리시스템(CEMS)도 일부 스마트그린산단에서 운영 중이다. 하지만 RE100 산단이 요구하는 것은 개별 기술의 나열이 아니라, 이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어 실시간으로 최적화하는 운영 능력이다.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저장과 수요 관리로 흡수하고, 전력망 상황과 연계해 AI가 운영을 조정하는 경험은 아직 축적 단계에 있다. 해외 사례처럼 ‘산단 단위 통합 실증’을 통해 데이터와 운영 노하우를 쌓지 않으면, RE100 산단은 정책 구호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관건은 선도 모델과 신뢰
결국 RE100 산단의 성패는 선도 모델을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1~2곳의 산단에서 재생에너지, 저장, 전력망, AI 기반 운영을 통합 실증하고, 안정성과 비용 구조를 데이터로 입증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이 판단할 수 있고, 민간 투자가 뒤따른다. 선언이나 인센티브만으로는 기업을 움직이기 어렵다.
RE100 산단은 에너지 정책이자 산업 전략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한국 산업이 선택할 수 있는 중요한 카드 중 하나다. 이제 남은 질문은 분명하다. RE100 산단은 계획된 미래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기업이 실제로 선택하는 산업 인프라로 작동할 것인가. 답은 기술과 제도, 그리고 실행의 속도와 신뢰에 달려 있다.
헬로티 임근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