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테인먼트에 주목하라 (1)
‘IT+게임’서 다음 먹을거리 찾아라 - 아이테인먼트의 현재와 미래 -
IT 산업이 대한민국의 대표 브랜드가 된 지 오래다. 반도체에서 시작해 스마트 기기에 이르기까지 내놓는 제품마다 글로벌 마켓을 석권하며, 세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 쉽게 오른 건 결코 아니다. 아마도 월드 베스트의 후속 아이템을 결정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은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많은 전문가들이 내놓은 모범답안이 ‘탄탄하게 구축된 하드웨어에 앉힐 명품 소프트웨어’이다. 그중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 바로 IT와 엔터테인먼트를 융합한 ‘아이테인먼트(ITainment)’이다. 본지는 이와 관련 아이테인먼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전망 연재를 통해 산업의 가능성을 집중분석한다. <편집자>
아이테인먼트의 태동
1950년 초반부터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경쟁적인 전략 무기의 개발로 이어졌고, 결국 핵무기의 보유량 경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만들었다. 당시 미국 핵무기 개발의 중심에 서 있었던 브룩헤이븐 국립 연구소는 핵무기 개발로 인해 인근 마을의 주민의 항의, 반전 운동을 하던 평화주의 운동가들에 의해 압박을 받고 있었다.
브룩헤이븐 국립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물리학자 윌리엄 히긴보덤(William Higinbitham)은 연구소를 방문하는 일반인에게 핵무기 연구소라는 이미지보다는 친근한 이미지를 싶어했고, 연구소에서 사용하던 오실로스코프(전류의 흐름과 강약을 표시하는 아날로그 기기)를 사용해 ‘테니스포투’를 만든다. 테니스포투는 공이 화면에서 사라지기 전에 콘트롤러를 통해 신호를 입력하면 반대로 튕겨 나가는 간단한 규칙을 가진 게임이다.
테니스포투는 금전적 이득을 목적으로 개발된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즉, 브룩헤이븐 국립 연구소를 방문했던 일부 방문객 외에는 존재 자체를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게임 역사상 그 존재가 잊혀질 뻔했던 테니스포투는 미국의 전문지인 『크리에이티브 컴퓨팅』(Creative Computing)이 발굴 조사를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많은 사람들은 테니스포투를 최초의 비디오 게임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디오 게임은 ‘전기로 작동하는 표시장치(TV 혹은 모니터)를 사용해, 입력신호를 전기적 계산을 통해 해석한 장치를 화면에 표시한다’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비디오 게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테니스포투는 비디오 게임이 아니며, 대중이 접근하기 어려운 실험실 속에서만 존재하며 대중문화 콘텐츠의 시작으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컴퓨터에서 탄생한 스페이스워
콘솔 게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최초의 비디오 게임은 미국 공학도 스티브 러셀(Steve Russell)이 1962년 연구용 컴퓨터 PDP-1(Programmed Data Processor-1)를 이용해 만든 ‘스페이스워’를 꼽는다.
스페이스워의 개발자 스티브 러셀은 당시 최고 성능을 자랑하던 컴퓨터 PDP-1을 최초로 접한 감동을 전하고 싶었다고 개발 동기를 밝힌 바 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는 목적과 함께 컴퓨터의 대단함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스티브 러셀은 게임의 재미를 위해 자신이 공부하던 물리학을 응용해 블랙홀의 중력을 구현해 낸다. 스페이스워 화면 중앙에 위치한 블랙홀은 우주선의 조종과 미사일의 탄도에 영향을 끼치는 역할을 했다. 테니스포투와 마찬가지로 실험실 속 이야기로 끝날 것 같았던 스페이스워는 스티브 러셀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미국 공학도들 사이에서 널리 배포됐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돼, 대중적인 게임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데 성공한다.
드디어 가전을 활용하다
스페이스워가 등장하고 10년 뒤, 발명가로 유명했던 랄프 베어는 길가의 노인과 손자의 장난을 보고 하나의 영감을 얻는다. 아이들의 장난에서 게임의 기본이 되는 아이디어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1972년 5월 랄프 베어는 시제품 ‘패크맨’을 대중에게 시연(현재의 베타테스트) 하고, 같은 해 가을 세계 최초의 가정용 전자 게임 상품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출시한다. 가정의 텔레비전에 연결해서 사용하는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발매와 동시에 10만 대가 판매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수명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가전제품 메이커였던 마그나복스가 자사의 물품을 취급하는 소매점에서만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판매하도록 허가했기 때문이다. 제품 홍보를 소비자의 입소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마케팅 방식으로는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가능성을 제대로 선보일 방법이 없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소비자는 이런 제품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다.
제품을 구매해 줘야 하는 소비자들의 이해도가 낮은 것도 문제였다. 새로운 방식의 놀이인 게임은 소비자의 무지 때문에 오해를 살 수밖에 없었다.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는 아이들의 성장과 어른들의 판단력을 흐린다는 소문이 퍼져 결국 판매 포기에 이른다.
최초의 가정용 게임기였던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시제품 ‘브라운박스(Brown Box)’는 현재 세계 최고의 박물관인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놀란 부쉬넬의 등장
많은 게임 업계 종사자들은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로 놀란 부쉬넬(Nolan K. Bushnell)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놀란 부쉬넬이 자신에 게임에 사용했던 다양한 아이디어와 마케팅 방식은 이후 콘솔 게임기와 아케이드 게임이 발전하는 데 있어 많은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놀란 부쉬넬은 1971년 스페이스워의 방식을 차용한 상업용 게임 ‘컴퓨터 스페이스’로 게임 업계에 등장했다. 놀란 부쉬넬은 1970년대 컴퓨터의 소형화와 보급화가 시작되면서 컴퓨터 스페이스의 대성공을 예감했다. 하지만 컴퓨터 스페이스의 판매량은 고작 2000대 정도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공과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제작됐던 스페이스워의 게임 방식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었다.
당시 놀란 부쉬넬은 컴퓨터 스페이스의 실패 원인으로 컴퓨터의 보급 부족과 게임 난이도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단점을 보완한 쉽고 단순하면서 몰입도 있는 게임 ‘퐁’을 만들게 된다. 놀란 부쉬넬은 이듬해인 1972년 아타리를 설립하고 같은 해 12월 29일 퐁의 판매를 시작한다. 2인용 탁구 게임인 퐁은 각자의 패널(탁구채)을 조작해 공을 상대 진영으로 넘기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게임으로 소비자들의 엄청난 반향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퐁 기계가 벌어들이는 동전을 바꾸기 위해 퐁을 설치한 가게 주인들은 은행을 자주 방문해야 했고, 많은 현금을 보유한 가게 주인들을 노린 무장 강도까지 성행하는 등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게임이 된 퐁의 업적은 놀란 부쉬넬에게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라는 명예와 더불어 부까지 안겨주었다.
랄프 베어와 ‘두 사람을 위한 테니스’
1세대 가정용 게임기로 분류되는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와 ‘아타리2600’은 복잡한 관계로 얽힌 사이이기도 하다. ‘아타리VCS’(이후 아타리2600으로 개명)보다 먼저 출시된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에도 퐁과 같은 게임인 ‘테니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2세대로 분류되는 카트리지 분리형 콘솔 게임기가 등장하기 시작한 1970년대. 놀란 부쉬넬의 성공은 퐁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란 부쉬넬을 콘솔 게임기 아타리2600과 게임 회사 아타리, 퐁을 만든 업적을 기려 게임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선사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발명가로 유명했던 랄프베어는 가정용 게임기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를 아타리보다 먼저 출시하면서 테니스라는 게임을 만들어 낸다. 이 당시 아직 아타리2600라는 게임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부쉬넬을 제외한 그 누구도 콘솔 게임기를 TV와 연결한다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콘솔 게임의 아버지를 랄프 베어로 꼽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세계 최초의 콘솔 게임기 역시 마그나복스 오디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그나복스 오디세이의 상업적 성공은 아타리2600에 비하면 미약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당시 가전용 가전제품을 제작해 판매하던 마그나복스는 자신들이 만든 전자 오락기(게임기)의 파급력을 과소평가해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았다. 마그나복스 대리점에서만 오디세이를 판매하면서 ‘오디세이를 하려면 마그나복스 텔레비전을 사야 한다’라는 오해를 사고 말았고, 결국 의미 있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런 소비자의 오해는 아타리가 가정용 퐁의 사용 설명서에 ‘흑백이나 컬러, 어떤 텔레비전에도 사용할 수 있다’고 표기하게 된 이유이다.
아타리2600 모습을 드러내다
1977년 10월, 가정용 게임기라는 새로운 사업 분야를 만든 아타리2600이 드디어 세상에 등장했다. 당시 가정용 컴퓨터에서 사용하던 롬카트리지(Rom Catridge)방식과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택한 아타리는 초창기에는 ‘아타리VCS(Atari Video Computer System)’으로 판매됐으나 이후 아타리2600으로 상품명을 변경한다.
아타리2600은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확신을 가졌던 당시 놀란 부쉬넬이 아케이드 게임인 퐁, 팩맨 등을 이식해 판매하며 큰 성공을 거둔다. 아타리2600은 출시 첫 해 25만 대, 다음해인 1978년 55만 대를 판매한다.
또한 당시 가공산업에서 전자-IT산업으로 전환되던 시점과 맞물려 많은 공학도들이 독특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게임을 제작, 판매하면서 아타리2600의 황금기가 열린다.
아타리2600은 결국 전용 게임의 지원에 힘입어 1979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최고의 인기 품목에 선정되면서 눈부신 행보를 이어간다. 또한 현재도 많은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슈팅 게임 장르인 ‘스페이스인베이더(Space Invaders)’를 1980년 1월에 출시해 2백만 대의 게임기를 판매하고,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20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다.
아타리는 가정용 게임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도 시도했다. 아타리는 자사의 게임 ‘소드퀘스트(Sword Quest)’를 이용한 대회를 진행하고, 게임 내에 등장하는 아이템인 왕관·검·성배 등을 황금으로 제작해 상품으로 제공하는 등 실험적인 마케팅을 지속적으로 펼쳐서 게이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혼돈의 중심이 된 아타리
아타리의 성과를 목격한 많은 공학도들은 게임 산업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됐다. 특히 아타리는 아타리2600으로 큰 성과를 거두자 실리콘밸리에 거대 연구소를 운영하며 전자제품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시작한다.
하지만 아타리의 황금기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오래가지는 못했다. 신작 게임기인 ‘아타리2700’의 개발 실패와 ‘아타리5200’의 기대에 못 미친 성과는 아타리의 경영 악화, 대규모 투자에 따른 자본금 고갈 등 여러 악재가 겹쳤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타리의 주요 프로그래머들이 당시 회사 정책에 불만을 품고 독립해 각자 소프트웨어 회사를 설립하면서 아타리는 회사의 중심을 잃고 흔들리게 된다. 현재 FPS 장르를 양분하고 있는 ‘메달오브아너’ 시리즈를 만든 액티비전(Activision)도 이때 설립됐다. 재미있는 것은 아타리에서 독립한 프로그래머들은 재직 당시보다 재미있는 게임을 연이어 만들어 아타리를 압박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소유권과 지적재산권에 대한 분쟁이 명확하지 않은 시절, 게임을 제작하던 중소업체들의 난립으로 아타리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아타리2600 게임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제작·판매할 수 있어 아무리 게임이 많이 팔린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아타리가 거두는 이익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스틱(Mystique)이라는 개발 업체에서는 아타리2600용 포르노 게임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내면서 당시 학부모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었다. 특히 인디언 여성을 주제로 한 ‘커스터의 복수(Custer's Revenge)’로 여성과 원주민 단체의 항의를 받는 등 여러 악재가 아타리는 사방에서 압박 당한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 새롭게 진출한 콜레코(Coleco)의 경우는 가정용 게임기 ‘콜레코 비전(Coleco Vision)’를 아타리2600의 게임 패키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해 아타리2600에 치명타를 날린다.
아타리의 몰락과 ‘아타리 쇼크’
1980년대 초 가정용 게임기 시장은 혼돈이란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게임 산업의 중심에 있었던 아타리의 여러 악재, 저질 게임의 난립, 라이선스 도용, 소프트웨어 무단 사용까지 현재는 금지된 모든 불법행위들이 만연했던 시기였다.
아타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신규 기종 개발에 연이어 실패하며 재정적 위기에 몰리게 됐고, 일본에서 새로운 강자 닌텐도(任天堂, Nintendo)가 급부상하면서 벼랑 끝에 몰린다. 아타리는 부진한 소프트웨어 판매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1982년 영화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ET를 게임으로 제작한다.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모은 ET를 게임으로 만들어 크리스마스 시즌에 판매를 시작하면 대박은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 이를 위해 아타리는 ET의 라이선스를 소유한 워너에게 2500만 달러 이상의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는 등 의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타리와 워너의 ET 라이선스 사용 계약이 정식으로 채결된 것은 1982년 7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약 5개월 남긴 상태라는 것이 문제가 됐다. 짧은 제작 기간을 맞추기 위해(기획, 제작, 배송을 제외한 실제 개발 기간은 1달 미만인 것으로 알려졌다) 급하게 만들어진 게임인 ET는 게이머들에게 있어 재앙과도 같은 최악의 게임이 됐다.
당시 아타리는 ET의 성공을 낙관적으로 분석해 400만 장을 소매점에 출하하지만 실제로 판매된 양은 150만 개에 불과한 최악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거기에다 전체 판매량 중 절판이 넘는 80만 장 가량은 게이머의 항의와 함께 반품돼 실질적인 판매량은 70만 장 이하였다.
결국 아타리는 ET에 사용된 라이선스 비용 2500만 달러가 독이 돼 어려운 재정 상황이 더 나빠졌고, 신규 사업의 연이은 실패, 수준 낮은 게임의 난립으로 게이머들의 이탈이 가속화 되면서 시장의 혼돈은 더욱 가속화된다.
이 혼돈은 게임을 판매하는 소매상과 개발사도 큰 타격을 입혀 관계사들 전체로 퍼져나가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결국 손해를 메울 방도가 없었던 소매상 주인과 개발사들이 줄도산했고,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재고 게임을 헐값에 파는 등 소매 시장에도 혼란이 야기됐다.
아타리의 성공에 고무된 여러 가전업체가 20여 종에 달하는 콘솔 게임기를 쏟아내면서 게임 산업 최대의 사건인 ‘아타리 쇼크’가 터진다.
아타리 쇼크의 결과로 미국은 통화질서와 경제체계가 붕괴 수준의 타격을 입게 됐고, 이는 곧 사회문제로까지 번진다. 게임을 판매하던 소매상들은 게임 관련 상품 판매를 거부하기 시작하고, 가전제품 업체인 콜레코와 마그나복스는 게임 산업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이 속에서 주요 수입원을 잃게 된 많은 개발사가 파산하면서 게임 산업은 시작과 동시에 파국을 맞는 비극을 겪게 된다.
서삼광 객원기자 (seosk@dailygame.co.kr)
서삼광 기자는 게임 업계 전문 매체인 데일리게임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게임에서 IT, 스포츠, 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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