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현장, 물류 창고, 개발자로 가득한 회의실—아직도 많은 산업 현장에서 여성은 소수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묵묵히, 때로는 거침없이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듣다'는 남성이 다수인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들을 매달 한 명씩 만나,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라, 현장에서 부딪히고 배우며 성장해온 진짜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섯 번째 주인공은 국내 클라우드 전자서명·전자계약 시장 1위 기업 모두싸인에서 브랜드와 홍보를 총괄하는 이찬미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장입니다.
인터뷰가 처음은 아니었다. 마케팅 강연 연사로, 채용 인터뷰이로 여러 차례 자신의 경험을 전해온 그는 녹취가 시작되자 막힘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부산대학교 앱 개발 동아리에서 출발한 회사에 스물넷, 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입사해 올해로 8년 차. 구성원들 사이에서 '화석'이라 불리는 이찬미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장이다. 국내 클라우드 전자서명 시장 점유율 71%, 1위 사업자 모두싸인의 브랜드와 홍보를 도맡고 있다.
체결의 10년에서, AI 계약 플랫폼으로
이찬미 팀장이 소개하는 모두싸인은 국내 클라우드 전자서명·전자계약 시장에서 71%의 점유율을 가진 1위 사업자다. 공개된 데이터 기준 33만 기업·기관이 서비스를 선택했고, 누적 이용자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계약서뿐 아니라 동의서, 신청서, 확인서 등 서명이 필요한 모든 문서에 쓰인다.
올해로 11년 차에 접어든 모두싸인은 이제 두 번째 10년을 계약 생애주기 관리, 즉 CLM(Contract Lifecycle Management) 플랫폼으로의 확장에 걸고 있다. 계약서 작성과 검토, 서명과 체결, 관리와 분석, 보관까지 계약의 시작부터 끝을 AI로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이 팀장은 이를 '예방법학'이라는 개념을 빌려 설명했다.
"계약 갱신 기한이 오기 전에 불합리한 조항은 없는지 체크해 드리고, 그럼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리스크나 비용 지출을 막아드리는 역할을 모두싸인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최근 잇따른 개인정보 유출 집단소송에서는 각각 수십만 명 규모의 위임장이 모두싸인을 통해 작성되기도 했다.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 다수의 의견을 빠르게 모으는 도구로도 쓰이고 있는 셈이다.
부산대 동아리로 시작한 회사, 우연이 쌓여 8년
모두싸인은 2015년 12월, 부산대학교 앱 개발 동아리에서 출발했다. 법학을 전공하고 고시를 준비하던 대표가 창업으로 방향을 튼 뒤 만든 회사다. 초기 멤버 상당수가 부산대 출신인 이유도 학교의 현장실습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이 팀장 역시 그 현장실습생 중 한 명이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던 그는 올리브영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콘텐츠 마케터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원래 합격한 곳은 다른 스타트업이었지만, 면접이 마지막 날이었던 모두싸인 쪽에서 뒤늦게 연락이 왔고, 우연히 두 회사 관계자끼리 친분이 있었던 덕에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때는 부산에 스타트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어요. 부모님이나 주변 분들은 회사 이름도 모르시던 시절이었죠."
6개월이던 실습 기간은 욕심으로 바뀌었고 그 열정은 그녀로 하여금 대학 졸업까지 미루게 만들었다. 그렇게 6년 반의 마케팅 실무와 1년 반의 리드 역할을 거쳐, 1년 전부터는 브랜드와 홍보를 전담하고 있다. 지금의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은 사실상 그녀 한 명에서 시작된 팀이다.
여자니까, 그래서 오히려 더 맞부딪쳤다
B2B 업계에서 만나는 상대는 대부분 남성이다. 여자라서, 어려 보여서,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은근한 편견이나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마주한 적도 있었다.
"부산 말투가 묻어나면 '여자가 서울에서 일하는데 아직 사투리를 안 고치냐'는 말을 진짜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서울 남자분들은 부산 사투리를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시기도 해서, 그렇게 넘기기도 하고요."
회사 안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그는 분명히 짚었다. 오히려 외부 미팅이나 전시 현장에서 마주치는 장벽이었다. 대처법은 간단했다. 극복이라기 보다 자신의 전문성과 결과로 자연스럽게 답하는 것이었다.
"그냥 '이거 제가 할 테니까 저에게 맡겨주세요', 이렇게 했던 것 같아요. 여자라서 도와달라는 것보다는요."
팀장이 된 지는 약 1년 반. 한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실무자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어느 순간 평가자의 자리에 서게 됐다. 회사가 기대하는 방향과 구성원이 바라는 성장을 어떻게 조화롭게 이끌어갈지, 그는 지금도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말했다.
제너럴리스트가 곧 스페셜리스트
홍보를 전담하기 전까지 그녀는 콘텐츠 제작부터 전시 기획, 영업 자료까지 마케팅의 거의 모든 영역을 거쳤다. 그 경험을 그녀는 '제너럴리스트'라는 말로 정리했다.
"B2B에서는 제너럴리스트가 스페셜리스트인 것 같아요. 회사가 준 기회들이 결국 다 제 것이 됐다고 생각하거든요." 주니어들에게 그녀가 강조하는 것도 결국 기회를 먼저 잡는 태도다.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손을 들고 '이거 저한테 맡겨주세요'라고 먼저 말했으면 좋겠어요.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모두싸인은 그런 환경과 분위기이기도 했지만요.)"
그녀는 지금의 가장 큰 과제로 '전자서명·전자계약 1위'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CLM으로의 확장을 어렵게 만드는 점을 꼽았다. 시장이 모두싸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계속 두드리며 확인하는 일이, 그녀가 요즘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다.
쉬는 법을 모르는 워커홀릭, 요즘은 달리기
8년 동안 일주일 이상 쉬어본 적이 없다. 장기근속 휴가로 받은 10일도 만료를 한 달 앞두고 여태 쓰지 못했다. 회사에서는 충분한 휴가를 주고 있지만, 일에 대한 욕심에 휴식보다는 모니터 앞에 앉게 된다는 그녀다. "쉰다고 한들 딱히 뭘 하고싶다라는 생각이 안들더라구요. 여행 가고 싶다는 마음도 잘 안들고요."
술도 거의 마시지 못한다. 대신 최근에는 러닝을 작은 취미로 즐기고 있다. 한강을 달리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러닝화와 장비를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했다. 러닝 이야기를 꺼내자 인터뷰 내내 차분하던 그의 표정에도 가장 편안한 미소가 번졌다.
MBTI는 ESTJ. 스스로도 인정하는 '엄격한 관리자'지만, 계획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다고 했다. B2B 마케팅과 홍보는 늘 새로운 변수를 마주하는 일이다. 그는 그 변수를 피하기보다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자신의 일이라고 말했다.
Mini Profile
이찬미 | 모두싸인 브랜드커뮤니케이션팀장 | MBTI : ESTJ
"B2B에서는 제너럴리스트가 스페셜리스트인 것 같아요."
다음 호에서 또 다른 업계의 그녀를 만나봅니다.
헬로티 김재황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