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로봇 산업은 출발선 위에 섰다. 미국과 중국은 피지컬 AI(Physical AI)와 휴머노이드 로봇(Humanoid Robot)을 앞세워 기술 패권 경쟁의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유럽·일본·중동 등 후발 경쟁권도 제조·물류·서비스 현장을 겨냥한 로봇 투자를 확대하는 중이다.
이 가운데 우리나라는 세계 1위의 로봇 밀도를 자랑하는 제조 강국이다. 하지만 차세대 시장 선점을 위해서는 부품·소프트웨어·인력·표준화 등 파편화된 과제를 하나로 통합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이 전환기 속 산업의 설계도를 완성하는 것은 정교한 알고리즘보다 촘촘한 생태계의 밀도다. 각종 로봇 행사 밖, 비공식적인 회로 등에서 오가는 대화가 때로는 공식 문서보다 더 강력한 실행력을 갖는다. 격식의 외피를 벗고 서로의 민낯을 마주하며 만드는 '날것의 접점'이 로봇 산업의 진짜 동력이 되는 배경이다.
한국AI·로봇산업협회(KAR)가 이달 2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소재 대모산 일대에서 ‘제15회 로봇인 등산대회’를 열었다. 집결지는 서울로봇고등학교였다. 행사는 산·학·연·관 관계자가 자연 속에서 친목을 다지고 협력 가능성을 나누는 자리로 마련됐다.
기자에게도 낯선 현장이었다. 전시장·기자간담회·세미나·포럼·인터뷰 등을 따라다니던 로봇 기자가 처음 합류한 로봇 업계의 네트워킹을 만나보자.
"정장은 잠시 안녕"...미래 인재의 요람 위에서 등산복을 입은 로봇 주역들
서울로봇고등학교에 들어선 참가자는 정장 대신 등산복을 입고 접수대 앞에 섰다. 손에는 브로슈어 대신 생수와 기념품 가방이 들렸다. 집결지에서는 로봇 산업계 이해관계자들이 한데 모여 인사와 안부를 나눴다. 평일 전시장에서 만났던 얼굴들이 산행 차림으로 다시 모인 것.


▲ (촬영·편집 : 헬로티 최재규 기자)
현장 분위기는 공식 산업 행사와 달랐다. 발표자료는 없었고, 제품 시연도 없었다. 대신 조 편성, 산행 안내, 네트워킹 게임, 오찬, 경품 추첨 등이 이어졌다.
이후 참가자들은 함께 모여 대모산 둘레길을 따라 움직였다. 산행을 잇는 줄은 느슨했고 서로 간 대화는 길었다. 기업 관계자, 연구기관 소속 연구원, 학교 구성원, 협회 일원 그리고 기자와 같은 미디어 로봇인 등이 서로 속도를 맞춰가며 대모산을 정복했다.
기자를 포함한 참여자 모두는 오르막, 내리막, 휴식 지점에서 한데 섞였다. 그 사이에서 공식 일정표에 없는 이야기가 날개를 폈다.


▲ 대한민국 로봇인들이 평소와는 다른 장소에서 협력을 다지고 있다. (촬영·편집 : 헬로티 최재규 기자)
로봇 기자에게 익숙한 현장은 대체로 목적이 명확하다. 전시회는 제품을 보여주고, 기자간담회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세미나는 시장을 설명하고, 인터뷰는 인물과 회사를 깊게 파고든다. 이날 등산대회는 달랐다. 특정 제품도, 특정 발표도 중심에 없었다. 사람 사이의 접촉 자체가 행사의 구조였다.
처음 마주한 장면은 예상보다 자유로웠다. 누군가는 농담으로 인사를 열었고, 누군가는 산길에서 다음 만남을 잡았다. 전시장에서는 회사명과 직함이 앞섰지만, 이날은 같은 조와 같은 길이 서로를 연결했다.
특히 신선했던 지점은 관계의 방식이다. 산업 행사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메시지를 정리한 뒤 말한다. 이날은 달랐다. 채용 고민, 실증 현장, 학교 교육, 테스트필드, 다음 아이템이 산길과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 정제된 답변보다 먼저 현장의 온도가 드러났다.
이처럼 로봇 산업의 협력은 계약서와 업무협약(MOU) 이전에 이런 느슨한 접촉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서류상 MOU보다 강한 '산길 대화‘, 로봇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설계도
로봇인 등산대회는 올해 15회를 맞았다. 행사는 서울로봇고등학교를 거점으로 이어져 온 로봇 업계의 연례 네트워킹 자리다. 전한구 한국AI·로봇산업협회 산업지원본부장은 이 행사가 2009년 무렵부터 서울로봇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사실상 매년 이어진 흐름이다.
참석자들은 기업·학교·연구기관·관계기관 등에서 온 인원이 함께 모인다. 전 본부장은 행사의 출발점을 “딱딱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소통하고 상호 협력할 수 있는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로 짚었다. 정량 성과를 내세우는 자리는 아니지만, 참석자들 사이에서 공동 연구와 협력 논의가 실제로 이어진 사례가 곳곳에서 들린다고 했다.
올해는 참가 신청을 250명 규모로 받았지만, 신청 수요가 300명이 넘어 행사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국내 로봇 산업의 외연이 확장되고 있고, 각 주체들 사이에서 연대·협력 없이는 생태계 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공감대가 두터워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협회는 이를 의식해 산행 전 네트워킹 게임과 레크리에이션 과정을 더해 관계 형성의 장치로 행사를 구성했다. 덕분에 기자와 같은 첫 참여자도 쉽게 행사에 녹아들 수 있었다.
"로봇 성장의 뿌리는 기술 아닌 '사람과 사람의 연결'"
이날 행사에는 지난 2월 선임된 오준호 한국AI·로봇산업협회 신임 회장도 참석했다. 오 회장은 올해 협회장 취임 이후 피지컬 AI와 차세대 로봇 시장을 둘러싼 산업계 전환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지난 취임식에서도 그는 피지컬 AI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본격적인 시장은 아직 형성 단계라고 진단했다. 또 AI와 결합한 차세대 로봇 경쟁에서는 한국도 새 출발선에 설 수 있다고 짚었다.
이번 등산대회 축사는 그 산업 진단의 조직·생태계 버전이었다. 오준호 회장은 “로봇 산업이 기술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연결 속에서 더 크게 성장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생각을 듣고 현장의 고민을 나누는 일이 산업을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강조점도 덧붙였다.
이러한 메시지는 이날 현장 분위기와 맞물렸다. 피지컬 AI와 휴머노이드 로봇이 산업의 전면 키워드로 부상한 지금, 국내 로봇 산업의 과제는 기술 개발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이 드러났다. 로봇을 검증할 테스트베드, 현장에 도입할 수요 기업, 제도를 움직일 기관, 인력을 키울 학교, 수요를 연결할 협회 등 참여자가 이에 대해 동의했다. 기술의 방향만큼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산업 현장으로 옮길 생태계의 밀도라는 것.
등산대회는 그 밀도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누가 어떤 현장을 고민하는지, 어느 학교가 어떤 인재를 키우는지, 어느 기관이 어떤 실증(Pilot) 기반을 준비하는지, 어떤 기업이 다음 협력 파트너를 찾는지 드러나는 자리였다.


▲ (왼쪽부터) 이달 새로 취임한 조영훈 한국로봇산업진흥원(KIRIA) 원장과 서울로봇고등학교를 이끌고 있는 오성훈 교장. 이들은 이날 축사에서 기관·학계 입장에서의 국내 로봇 산업 비전을 공개했다. (촬영 : 헬로티 최재규 기자)
산행은 끝났지만 취재는 시작됐다...로봇 기자의 수첩에 적힌 새로운 이름들
이날 기자에게도 다음 취재원이 생겼다. 등산대회는 기사 한 편의 현장에 그치지 않았다. 로봇 인재, 테스트필드, 채용, 교육 현장 등을 잇는 다음 기획의 입구가 됐다.
이날 등산대회가 남긴 가장 큰 장면은 ‘재미’였다. 서로 다른 위치의 사람들이 부담을 낮춘 상태에서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다시 협력·실증·교육으로 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전환기 산업일수록 이런 비공식 회로는 중요하다. 기술은 빠르게 바뀌지만, 산업을 움직이는 신뢰는 반복된 만남 속에서 축적되기 때문이다.
한 참여자는 이런 자리는 산업 생태계에 꼭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로봇 산업처럼 기술·제도·인력·수요가 동시에 맞물리는 분야는 하나의 구성원이 산업을 혁신하지 못한다”며 “서로 다른 현장을 가진 사람들이 격식을 낮춘 상태에서 산업의 긴장을 풀고 반복해서 만나야 한다”고 전했다.
로봇인 등산대회는 매년 로봇 산업의 다음 경쟁력이 기술 발표장과 실증 현장 사이에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 사이를 잇는 것은 사람이다. 올해 등산대회는 그 사실을 대모산 길 위에서 확인시켰다.
봇규의 한마디
정답은 로봇인들의 흙 묻은 신발에 있을 수도
헬로티 최재규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