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의 다음 경쟁력은 로봇이 아니라, 인간의 암묵지를 얼마나 정교하게 학습시키고 지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생성형 AI(Generative AI)가 인간 언어를 학습하며 지식 노동의 판을 흔들었다면, 피지컬 AI(Physical AI)는 인간의 손끝을 학습하며 제조업의 판을 흔들고 있다. 최근 해외 제조 인공지능(AI)의 최전선에서는 숙련공의 손동작, 힘 조절, 작업 순서, 예외 상황에서의 판단까지 데이터로 수집되기 시작했다. AI가 다음으로 학습하는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숙련’이다.”
AI, 공정 데이터부터 사람 행동을 학습하다
글로벌 통신매체 AP(Associated Press)는 최근 국내 AI 스타트업 리얼월드(RLWRLD)가 공장·물류·호텔 등 현장 숙련 작업자 움직임을 촬영·분석해 로봇용 AI 브레인을 개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물류 현장에서는 작업자가 상품을 집고 옮기는 방식이, 편의점에서는 식품 진열 방식이 데이터화된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인간의 복잡한 손동작과 작업 순서를 로봇이 학습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는 것이 목표다.
아울러 호텔 직원이 냅킨을 접고 와인잔을 닦는 동작이 머리·가슴·손에 부착된 카메라를 통해 기록되고 있다.
같은 AP 보도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명장’의 직관적 노하우와 기술을 AI 제조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는 약 3300만 달러(약 500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제조 현장의 숙련이 개인의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국가 차원의 AI 학습 자산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편, 프랑스 로보틱스 스타트업 제네시스AI(GenesisAI)도 같은 방향을 보여준다. 이 회사는 최근 로봇용 AI 모델 ‘GENE-26.5’와 인간 손을 모사한 ‘로봇 핸드’를 공개했다. 또 다른 통신매체 로이터(Reuters)에 따르면, 사측은 센서가 달린 장갑을 활용해 산업 현장 작업자로부터 대규모 작업 데이터를 수집하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인간의 움직임을 로봇으로 직접 전이할 수 있는 데이터 엔진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로봇 핸드가 주목받는 이유
기존 산업용 로봇은 정해진 위치에서 정해진 동작을 반복했다. 환경이 통제되고 작업이 반복적일수록 효율은 높았다. 자동차 용접, 반도체 이송, 물류 분류처럼 규칙이 명확한 작업에서는 이미 로봇의 강점이 입증됐다.
하지만 실제 제조 현장에는 훨씬 더 많은 변수가 있다. 케이블을 묶고, 유연한 소재를 다루고, 위치가 조금씩 다른 물체를 잡고, 예외 상황에서 즉각 판단해야 한다. 이런 영역에서는 인간의 손이 여전히 강했다.
이러한 손에는 힘 조절, 방향 감각, 촉각, 반복 경험, 순간 판단이 모두 작용한다. 제조업에서 ‘손’은 노동의 도구이자 지식의 저장소인 것. 이 가운데 숙련공의 손끝에는 매뉴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판단이 축적돼 있다.
AI 스타트업 ‘스킬드AI(Skild AI)’의 범용 피지컬 AI 모델이 미국 휴스턴 폭스콘에 있는 엔비디아(NVIDIA) 블랙웰(Nvidia Blackwell) 그래픽처리장치(GPU) 서버랙 조립 라인에 초기 상업 배치를 완료했다. 스킬드AI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글로벌 로보틱스 업체 ABB로보틱스(ABB Robotics)·유니버설로봇(Universal Robots) 등과 협력해 더 많은 산업용 로봇에 자사 소프트웨어를 이식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현장 데이터를 수집하고 다시 모델을 고도화하는 ‘데이터 플라이휠(Data Flywheel)’ 전략을 가속화한다는 구상이다.
시장의 전망도 이러한 기술적 흐름을 뒷받침한다. 글로벌 전략 컨설팅사 베인앤컴퍼니(Bain & Company)는 ‘2026 산업 자동화 보고서’를 통해 2030년까지 산업 자동화 매출의 절반 가까이가 AI 기반 솔루션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AI 기반 솔루션만으로도 약 700억 달러(약 100조 원)의 신규 시장 가치가 창출될 것이라 내다봤다. 이는 제조업의 핵심 가치가 과거의 단순 제어 장비에서,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학습하는 ‘지능 레이어(Intelligence Layer)’로 완전히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숙련 데이터의 주인은?
기술의 진보 뒤에는 제조업이 피할 수 없는 도덕적·법적 질문이 뒤따른다. 공장 안에서 작업자 움직임 촬영, 미세한 손동작, 힘의 세기, 관절 각도까지 수치화한다면 이를 단순한 ‘업무 기록’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의 평생 기술을 추출한 ‘지식 자산’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기업이 이 데이터를 독점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는지, 그리고 자신의 숙련이 AI 학습의 밑거름이 된 작업자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AP는 한국 노동계의 로봇 도입이 전통적인 기술 계승 구조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단순한 노동 대체에 그치지 않는다. 만약 현장의 숙련 데이터가 외부 로봇 기업이나 플랫폼 권력에게 통째로 넘어간다면, 제조사의 핵심 경쟁력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우려다. 설비는 돈으로 살 수 있고 알고리즘과 클라우드 인프라는 빌려 쓰면 그만이지만, 특정 공정과 현장에 최적화된 ‘숙련 데이터’는 결코 쉽게 복제될 수 없는 제조사의 최후 보루이기 때문이다.
이 배경에서 제조 현장의 숙련도가 높은 한국·일본·독일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숙련 데이터를 수집하는 기업이 아니라, 그것을 지식 자산(Asset)으로 관리하고 지킬 수 있는 기업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로봇 도입보다 먼저 해야 할 것
이 흐름에서 제조 기업이 해야 할 일은 숙련 데이터 거버넌스를 설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떤 숙련을 데이터화할지부터 정해야 한다. 모든 작업을 무차별적으로 촬영하고 수집하는 방식은 현장의 신뢰를 잃기 쉽다. 반복적이고 위험하며 자동화 효과가 명확한 영역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데이터가 누구 자산인지도 명확히 해야 한다. 작업자의 움직임이 회사의 업무 과정에서 발생한 데이터인지, 개인의 기술과 경험이 반영된 지식 자산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으면 분쟁의 씨앗이 된다.
숙련공의 기술이 AI 모델 성능을 높이는 핵심 학습 자산이라면, 그 기여는 단순한 근무 시간으로만 평가될 수 없다. ‘AI 학습 기여도’가 새로운 형태의 현장 지식 보상 기준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외부 로봇·AI 기업과 데이터를 어디까지 공유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플랫폼 기업이 제조 현장 데이터를 가져가 학습한다면, 장기적으로 가치는 제조사보다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제조사는 단순한 기술 사용자가 아니라 자신의 공정 지식과 숙련 데이터를 보호하고 활용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
제조업의 경쟁력은 이제 세 단계로
앞으로 제조업의 경쟁력은 세분화될 것이다. 공장을 자동화하는 기업, 공정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업, 인간의 숙련을 데이터화해 AI와 결합하는 기업. 다시 말해 현장의 숙련을 깊게 이해하고, 그것을 AI가 학습할 수 있는 구조로 바꾸며, 동시에 사람과 기술의 관계를 재설계하는 기업이 차세대 시장 패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제조업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사람의 어떤 능력이 데이터가 되고, 그 데이터의 가치는 누구에게, 어떻게 돌아가는가다. 제조업의 다음 경쟁력은 로봇의 손에 있지 않다. 그 로봇이 배운 인간의 손끝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