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배터리 규정, 기업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CSDDD) 등에서 ‘제품 단위’ 규제가 현실화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 기업 실무자들이 현장에서 체감하는 병목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1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베트남 그린 제조 밸류체인 협력포럼’ 패널 토론에는 LG전자·삼성SDI·KGM·SK AX의 실무자들이 참석해 업종별 규제 대응 애로와 실행 전략을 공유했다. 발표자들은 한목소리로 “엑셀 중심의 수기 대응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며, 데이터 표준화·검증 체계와 공급망 단위 협력 구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2%는 공장, 98%는 공급망…실무가 말한 규제 대응의 핵심
LG전자 전장사업부에서 PCF 실무를 맡고 있는 곽한울 책임은 글로벌 고객사의 요구가 이미 ‘구매·입찰 조건’으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주요 OEM 글로벌 고객사들은 입찰 단계에서 정밀한 PCF 데이터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카테나X 같은 글로벌 데이터 플랫폼 연동을 구매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고 있다”고 밝혔다.
곽 책임은 제품 탄소배출의 구조를 ‘공급망 문제’로 설명했다. 그는 “제가 크래들 투 게이트(Cradle-to-Gate) 기준으로 탄소배출량을 측정해 보니, 공장 자체 배출은 2%에 불과하고 나머지 98%가 공장에 들어오기 전에 원소재와 협력사 단계에서 발생했다”고 말했다.
이어 “탄소중립의 핵심은 결국 공급망 관리일 수밖에 없다”며 “지금처럼 대기업이 수많은 2차·3차 협력사를 일일이 찾아가 교육하고 개별적으로 시스템 투자를 지원하는 방식으로는 규제를 따라잡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배터리 업계에서는 규제가 ‘보고’ 수준이 아니라 ‘검증’ 수준으로 강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삼성SDI ESG전략그룹에서 탄소발자국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이주영 프로는 “제품을 기준으로 연결된 데이터들을 종합해 탄소배출량을 산정해야 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터의 퀄리티, 즉 신뢰할 만한 데이터인가”라고 강조했다.
이주영 프로는 특히 제3자 검증 부담을 짚었다. 그는 “EU에서 직접 지정한 노티파이드 바디(Notified Body) 기관에 의해 검증을 받아야 한다”며 “그들이 요구하는 검증 수준이 지금 한국 기업이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더 디테일할 것으로 예측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건 한 기업만의 노력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 업체들의 대응 역량을 함께 끌어올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모빌리티 분야에서는 규제가 부품·소재 단계로 먼저 내려오는 흐름과 ‘데이터 취합’의 현실적 난제가 강조됐다. KGM에서 탄소중립 선행 대응을 맡고 있는 김윤영 팀장은 “엔진은 100여 가지 부품이 모여 한 개가 된다”며 “탄소를 증명하려면 100여 개 공급망으로부터 데이터를 받아 모아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볼트나 판재처럼 단순 품목은 대응이 상대적으로 쉽지만, 복잡한 부품군은 공급망 전체를 건드리는 문제”라며 “의무 주체가 수입업자(다운스트림)로 설정되는 규제도 있어, 제조 단계에서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갑자기 자료 제출 요구가 내려오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IT·AX(인공지능 전환) 관점에서는 데이터 체계를 ‘공급망 연결 인프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SK AX에서 ESG 신규 사업 개발을 맡고 있는 윤향노 팀장은 “데이터 투명성(Data Transparency), 데이터 신뢰성(Data Trust), 데이터 연결성(Data Connectivity)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윤 팀장은 “데이터 투명성은 PLM, MES, BOM, ERP 등 제품·공정 데이터를 투명하게 연결하고 실시간으로 조회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며 “데이터 신뢰성은 그렇게 모은 정보를 검증·인증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데이터 연결성은 회사 내부를 넘어서 거래 관계에 있는 공급망 기업 간 데이터까지 투명하게 연결하고 관리하는 범위를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유럽이 요구하는 전송 방식이 바뀌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럽에서 요구하는 데이터는 이메일 형태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카테나X 같은 데이터 스페이스를 통해 전송·교환할 수 있는 체계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 체계를 운용하려면 통합 솔루션뿐 아니라 산단·정부 차원의 거버넌스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패널 토론에서는 공통적으로 ‘개별 기업 단독 대응’의 한계가 지적됐다. 특히 2·3차 협력사로 갈수록 데이터·인력·예산이 부족해지는 현실에서, 기업이 각자 대응하기보다 산업단지 단위로 데이터 관리·검증·교육을 묶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의견이 이어졌다.
실무자들은 규제 대응이 단순한 보고·인증을 넘어 공급망 운영 방식과 투자 판단까지 바꾸는 ‘구조 변화’로 확산하는 만큼, 데이터 표준화와 검증 체계, 재생에너지 조달 기반, 공급망 파트너 간 협력 채널을 동시에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헬로티 이동재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