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BOT] “대출은 ‘숫자’를 투자는 ‘가능성’을”...신산업 자금의 이중 잣대

2025.09.05 18:30:28

최재규 기자 mandt@hellot.net

 

로봇·인공지능(AI) 등 신산업 기업들의 자금줄은 여전히 벤처캐피털(VC)과 정책금융기관에 집중돼 있다. 주류 금융의 문턱은 높고, 민간 금융 역시 보수적 심사 탓에 쉽사리 닿지 않는다. 하지만 드물게 이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또 다른 통로가 있다. 왜 신산업 기업들은 위험이 큰 선택임을 알면서도 금융권의 문을 두드리게 될까.

 

대부분의 기업은 외부 자금 없이는 성장 곡선을 유지하기 어렵다. 특히 로봇·AI 분야는 연구개발(R&D)과 설비 구축 등 선행 투자가 크지만, 매출이 안정화되기까지 수년이 걸린다. VC나 정책 과제가 초기 성장 동력을 제공하지만, 투자 공백이나 집행 지연이 생기면 기업은 곧바로 자금난에 직면한다. 이때 선택지는 많지 않다. 기업들은 자금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보수적인 금융권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매출과 투자 사이 간극을 메우는 생존 전략에 가깝다.

 

다만 금융권이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다. 성장성과 기술력보다 당장의 현금흐름, 원리금 상환 능력을 우선시한다. 담보나 실적이 부족한 신산업 기업에겐 이 벽이 높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인건비, 서버 사용료, 부품 조달 같은 시급한 지출을 막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다. 결국 금융권의 문을 두드리는 행위 자체가, 불안정한 산업 구조와 자금 운용의 현실을 드러내는 장면인 셈이다.

 

 

신산업 자금의 병목, 좁은 출발선

 

신생기업의 생존성 자체는 높지 않다. 통계청 ‘기업생멸행정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7년 신생기업의 5년 생존율은 34.7%에 불과하다. 세 곳 중 두 곳은 창업 5년을 버티지 못한다는 의미다. 신생기업 다수는 담보 자산과 장기 실적이 부족해 전통적 대출 심사에서 고위험군으로 분류되기 쉽다.

 

산업별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로봇산업의 2023년 매출은 5조9805억 원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제조용 로봇이 2조9900억 원 규모로 전체 산업의 절반을 차지했다. 서비스용 로봇도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 시장은 지난해 대비 매출이 13.4% 증가했으며, 의료·물류·국방 분야에서 활용이 늘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매출 규모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기업 구조는 여전히 영세·중소 중심이라고 우려한다. 프로젝트 단위 납품이 많아 현금 회수 주기가 길고, 외상 매출과 재고가 쌓이면 단기 유동성 압박이 심각해진다는 게 그 근거다.

 

다른 한편, AI 기업은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유형자산은 거의 없지만 인건비·데이터·그래픽처리장치(GPU) 서버·클라우드 비용 등이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글로벌 조사에서는 서버·클라우드 비용 부담을 AI 도입의 가장 큰 장벽 중 하나로 꼽았다. 생성형 AI(Generative AI) 확산으로 대규모 연산 수요가 폭증하면서, 중소기업은 안정적 현금흐름을 만들기 더욱 어려워졌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성장 초기 단계의 로봇·AI 등 신산업 기업들은 안정적 매출을 확보하기 전 단계에서 자금난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결국 투자사 입장에서는 투자·대출 모두 회수 가능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정성적 평가만으로 결정하기는 어렵다. 다른 투자 대안이 워낙 많다는 것도 부담”이라고 말했다.

 

브릿지 자금, 신산업 기업의 생존 방식 될까

 

무형자산 담보도 여전히 걸림돌이다. 특허청 조사에 따르면, 지식재산권(IP) 담보대출 1390개 기업 중 77.7%가 신용등급 'BB+' 이하로 분류됐다. 가치 산정과 사후 관리의 어려움 탓에 동산·IP 담보 대출은 활성화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민간 금융을 찾는 이유는 분명하다. 매출 회수 시점과 급여일이 맞지 않을 때 발생하는 운영비와 인건비 충당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정부 과제나 VC 투자 계약이 체결됐지만 실제 집행까지 수개월이 걸리는 브릿지 자금, GPU 서버 사용료나 부품 조달 차질 같은 예상치 못한 비용 급등 때문이다. 해외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미국·유럽의 AI 스타트업들도 GPU 대여비 폭등으로 한 달에 수천만 원 이상을 지출하는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또 다른 금융 업계 관계자는 “로봇 기업은 생산 설비 같은 자본적지출(CAPEX)과 R&D 비용이 동시에 필요하다. 하지만 이 돈이 필요한 시점은 매출이 발생하기 전이라 외부 조달이 어렵다”고 분석했다. “특히 AI 기업은 서버·클라우드 비용이 지속적으로 빠져나가는데, 아직 한국 시장이 성장기라는 점에서 두드러진 투자 패턴이 나오지 않는 것도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정책금융과 벤처투자만으로는 모든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간헐적으로라도 저축은행이나 캐피털 등 민간 금융 창구를 찾는다. 메인 자금줄은 아니지만, ‘정책-VC’ 사이 틈새를 메우는 보조 창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대출은 다운사이드, 투자는 업사이드”...숫자와 가능성을 좇는 서로 다른 이유

 

 

투자 리포트가 성장성과 주가를 중심으로 산업을 비춘다면, 금융 심사 과정은 훨씬 더 보수적이다. 신산업 기업이 드물게 이 창구를 찾을 때, 산업 현장의 자금 현실이 오히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10년 뒤 기업 가치’를 강조한다면, 금융 심사역은 ‘이번 달 원리금 상환’을 먼저 묻는다. 재무제표 검토는 기본이고, 가치사슬(Value Chain) 내 위치, 거래처 안정성, 기술 실효성 등을 촘촘히 따진다.

 

업계 관계자는 “대출은 돈을 갚을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재무 상태, 유동성, 현금흐름 등 숫자를 본다”며 “투자는 원금 회수 가능성과 함께 얼마나 추가 수익을 낼 수 있는지, 즉 업사이드가 중요한 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은행은 조달 금리 이상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더욱 보수적이고, 투자자는 투자 회수(Exit Strategy) 가능성만 보이면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고 부연했다.

 

누가 신산업의 현실을 가장 가까이 보는가

 

금융권 내부에서는 기업마다 성숙도에 따라 자금 라인이 다르다고 평가한다. 관계자는 “초기에는 정부 기금이나 창업 초기 기업에 개인·소규모 투자자가 자기 자금을 투입하는 형태의 엔젤투자 등이 주를 이룬다”며 “이후에 벤처캐피털(VC)과 사모펀드가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매출이 작고 영업손실이 누적되면 투자 매력이 떨어져 검토 단계에서 무산된다”고 전했다.

 

덧붙여 “투자 검토는 10억이든 100억이든 공수가 비슷하게 들어가기 때문에, 위험이 큰 기업에는 손을 대기 어렵다”고 언급했다.

 

심사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패턴도 있다. 일부 로봇 기업은 납품 대금 지연으로, 몇몇 AI 기업은 서버·클라우드 비용 부담으로 자금이 막히는 경우다. 공통적으로 인건비 때문에 단기 자금이 급한 사례도 있다. 다만 저축은행 입장에서는 브릿지 자금 수요를 직접 취급하기보다, 은행 대출·사모사채 등 다른 수단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이다.

 

 

정책·감독 기조도 이중적이다. 금융당국은 저축은행권의 PF(Project Financing)·건전성 관리 강화를 주문하는 동시에, AI·데이터 기반 신용평가 고도화와 혁신기업 지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금융 관계자는 “사실 정부 차원에서 이미 신산업 분야 펀드가 다양하게 조성되고 있다. 성장금융, 일부 은행 등이 정책자금을 출자하고, 민간 자금을 매칭하는 구조가 일반적”이라며 “AI·로봇 같은 특정 섹터 펀드도 이미 설정돼 운용 중”이라고 설명했다.

 

사례는 많지 않지만, 그만큼 데이터의 가치가 크다. 정책금융이나 VC는 확인하기 어려운 ‘운영 현장의 리스크’를 금융 심사가 드러내기 때문이다. 외상 매출의 회수 가능성, R&D 비용의 집행 적정성, 기술 검증 지연 등이 대표적이다. 업계에서는 이 때문에 심사역들을 ‘신산업 생태계의 숨은 관찰자’라고 부른다.

 

화려한 투자 유치와 정책 지원 뒤에는 매달 원리금과 급여를 고민하는 기업들의 숨은 현실이 있다. 금융 심사는 그 현실을 드러내는 또 다른 창구이자, 신산업 생태계의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이다.

 

끝으로 관계자는 “이런 현실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미 정부가 여러 금융 정책을 통해 AI·로봇 등 특정 섹터 펀드를 조성하고 있고, 민간 금융과 매칭하는 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이 틀을 더 정교하게 다듬고 보완한다면 신산업 기업들의 자금난도 장기적으로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헬로티 최재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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