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마트폰을 설계할 때 건축가가 설계도를 일일이 손으로 그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몇 달,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반도체도 마찬가지다. 설계자가 수십억 개의 트랜지스터를 일일이 배치한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제는 AI가 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마치 자율주행차가 도로 위에서 최적 경로를 찾아내듯, AI는 수많은 설계 가능성을 탐색해 최적의 답을 내놓는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반도체가 다시 강력한 AI를 탄생시킨다는 점이다.
AI 파트너와 스마트 팹의 등장
현재 AI는 복잡한 설계 작업을 수개월에서 수시간 또는 수일로 단축하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EDA 툴은 반도체 산업의 보이지 않는 엔진이다. 시놉시스와 케이던스는 이미 AI를 탑재한 차세대 툴을 내놓았다. 일찍이 시놉시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애저를 활용한 ‘Synopsys.ai Copilot’을 발표했다. 자연어 AI 인터페이스로 설계 툴을 보조하며, 설계 효율과 생산성을 모두 높였다. 지난 5월 공개된 케이던스의 ‘Cerebrus AI Studio’는 멀티블록·멀티유저 환경에서 대규모 SoC 설계를 가속한다.
파운드리 경쟁의 무대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누가 더 작은 선폭을 먼저 구현하느냐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공장을 얼마나 똑똑하게 운영하는지에 대한 역량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해졌다. TSMC는 ‘어드밴스드 패키징 팹’에서 올해 초부터 딥러닝과 이미지 인식 기술을 활용한 ‘인텔리전트 패키징 팹’을 가동 중이다. 제조 실행 시스템(MES), 고급 공정 제어(APC), 자동 자재 처리 시스템(AMHS), 그리고 ADC(Advanced Defect Classification)를 통합하여 실시간으로 불량을 식별하고 수율을 최적화하며 생산 효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인텔은 이미 10년 이상 AI 비전 기반 검사를 적용해 왔다. 2025년 4월 기준 내부 문서에 따르면, 가우디 가속기를 이용한 AI 모델 학습을 통해 DL 모델 학습 시간을 약 20% 단축했고, 이를 기반으로 수율 개선 및 비용 절감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알려졌다. 또한, AI 기반 예측 유지보수 및 실시간 이상 탐지 시스템을 통해 ‘학습하는 공장(Learning Fab)’으로의 전환을 추진 중이다. 파운드리 경쟁은 단순한 나노기술 전쟁을 넘어, 데이터를 기반으로 AI로 운영하는 지능형 경쟁 체제로 진화하고 있다.
테스트·패키징의 위상 높아지다
반도체 칩은 생산만큼이나 검사도 중요하다. 하지만 검사 비용은 제조비의 20~30%에 이를 정도로 크다. AI는 이 영역에서도 혁신을 만들고 있다. 어드반테스트는 2023년 12월 ACS Real-Time Data Infrastructure(ACS RTDI)를 선보였다. 이 플랫폼은 반도체 테스트 데이터를 밀리초 단위로 수집·분석·저장해 동일 테스트 주기 내에서 실시간 검사 결과를 생산 공정에 자동 반영하도록 설계됐다. KLA는 AI 기반 계측 및 검사 시스템을 활용해 공정 변동성을 줄이고, 결함 분류 및 수율 최적화를 지원한다. AI 알고리즘은 공정 조건을 실시간으로 분석·제어하고, 데이터 기반의 프로세스 제어를 가능하게 만든다.
인텔은 지난 10년간 머신비전 및 AI 기반 검사를 공정에 도입해 왔으며, 최근에는 딥러닝 기반 패턴 인식 자동화를 통해 불량 패턴 탐지 정확도와 수율 분석 속도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SK하이닉스는 과거에 딥러닝 기반 시각 검사 시스템으로 검사자의 수작업을 약 75% 자동화했으며, 불량 탐지와 원인 분석 속도를 3배 이상 개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테스트는 단순 비용이 아니라 차별화한 경쟁 요소다. 품질 확보와 출시 속도를 좌우하는 새로운 경쟁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최근 AI 서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GPU와 HBM의 결합이다. 그런데 이 성능은 패키징에서 결정된다. GPU와 HBM을 어떻게 묶느냐에 따라 데이터 전송 속도와 전력 효율이 달라진다. 엔비디아는 최신 AI GPU인 블랙웰 설계에 TSMC의 CoWoS-L 패키징 기술을 도입했다. 엔비디아 젠슨 황 CEO는 CoWoS-L에 대한 수요가 증가 중이며, 기존 기술보다 연결성과 대역폭을 개선할 수 있지만 패키징 캐파는 여전히 병목이라고 지적했다. TSMC는 이러한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CoWoS 패키징 생산능력을 지속해서 확대할 계획이다.
삼성전자의 경우는 후공정 강화를 위해 3D 패키징과 글라스 인터포저 개발을 추진하며 HBM4 대응에 나섰다. 미국 텍사스에는 첨단 패키징 클러스터를, 일본 요코하마에는 R&D센터 설립을 진행 중이다. 또한, 시놉시스와 협업해 멀티다이 설계 성과를 냈고, 2026년 범프리스 X-Cube도 준비하고 있다. 후공정으로 여겨졌던 패키징은 이제 반도체 성능을 현실로 끌어내는 마지막 관문이자 글로벌 경쟁의 핵심 무대로 부상했다.
반도체 산업, AI 팩토리 시대 돌입하다
이 모든 변화를 아우르는 키워드는 AI 팩토리다. 젠슨 황 CEO는 “AI 데이터센터는 사실상 AI 공장”이라고 말했다. AI 모델이 학습하는 데이터센터와 반도체가 생산되는 팹이 점차 유사한 구조로 닮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데이터, 모델, 칩 설계, 제조, 검사, 패키징이 하나의 피드백 루프로 연결되는 것이다. AI가 반도체를 더 빠르고 정밀하게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반도체가 다시 더 강력한 AI를 학습시킨다. 각국 기업들이 이 루프의 다른 지점을 차지하며 새로운 동맹과 경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 기업은 여전히 메모리와 파운드리에서 세계 최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EDA 소프트웨어, 첨단 검사 장비, 패키징 기술에서는 취약하다.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AI-EDA 역량 강화, 스마트 팹 운영 역량 확보, 테스트 자동화 투자, 첨단 패키징 내재화가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칩을 만드는 방식 자체를 혁신하는 풀스택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
미래 반도체 경쟁은 더 이상 단순히 공정 미세화 경쟁이 아니다. 설계는 빨라지고, 제조는 똑똑해지며, 검사는 실시간으로 진화하고, 패키징은 성능을 현실로 만든다. AI가 반도체를 만드는 방식을 바꿀수록, 반도체는 다시 AI를 키운다. 결국 승자는 AI를 잘 쓰는 기업이 아니라, AI로 반도체를 잘 만드는 기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의 새 전쟁터는 이미 열렸고, 그 무대는 글로벌 풀스택 혁신의 각축장이다.
헬로티 서재창 기자 |